Come il cuore va./diario 276

20210112

아침부터 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옷을 단디 챙겨입고 털신으로 무장한 채 빗자루를 들었다. 시골의 장점이자 단점은 집의 경계가 다소 모호하다는 것인데 집 자체는 담벼락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골목을 공유하고 있다보니 어디까지가 우리집 마당이고 우리집 골목인지 알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감나무잎 쓸기와 눈 쓸기는 젊은이의 몫이 되고 옆집의 앞집의 앞집에 사는 조카들이 모두 학교에 갔기 때문에 불행히도 현재 이 마을의 젊은이 중에 으뜸 젊은이는 바로 나다. 으뜸 젊은이의 보호자인 아빠의 뒤를 밟으며 총총총 눈을 쓸었다. 동네 한 바퀴 휘젓고 난 뒤 매실차와 호박즙을 데워 마셨다. 장작에 땅콩을 구운 후 껍질을 까서 간식통에 넣어두었다. 그 다음으로는 엄마가 반죽해 놓고 간 김치전을 부치고 ..

20210103

길고 지루했던 한 해가 가고 드디어 아홉수가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크고 작은 소원들이 있는데 우선 내 양심이 허락하는 작고 소소한 소원으로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잘 적응해 부디 0.8인분의 몫은 하기를 노무사 1차 시험에 턱걸이든 뭐든 합격해 내 운빨을 이어가기를 친척들과의 접촉을 아슬아슬하게라도 피해 결혼 잔소리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그리고 웬만하면 이루어지길 바라는 큰 소원으로는, 적게 일하고 그보다는 많이 벌기를 아빠가 절주하고 엄마가 아침밥하지 않는 가정이 되기를 타인의 호의를 불편해하지 않고 감사히 여기는 삶이 되기를. 일 년에 두세 번 만나는 모임이 있다. 그 모임에 속한 어떤 언니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귀엽다는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데 한 번은 내 손톱 끝이 갈라져 있는 걸..

20201221

면접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수내에 들러 크리스피도넛을 하나 챙기고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망할 놈의 분당 비비큐가 배달을 모두 취소하는 바람에 다시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나와 버거킹 치즈와퍼를 포장했다. 몇달 전 오빠가 호주머니에 챙겨준 크림까르보나라 불닭볶음면도 꺼냈다. 이렇게 맛있을 줄 알았으면 더 달라고 할걸. 오늘도 인생사 정말 쉽지 않지만 햄버거 하나 컵라면 하나 초콜릿 하나 맥주 한 캔 역시 지금까지 살길 잘했다.

20201207

오늘은 문어가 집에 놀러왔기 때문에 특별히 연어와 육회를 주문했다. 1층 현관에서부터 발열과 인후통이 있는지 물어보자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님이 주신 레몬청에다가 탄산수를 섞어 레몬에이드를 만들었다. 신나게 먹고 마시며 자그마치 15년치 묵은 이야기보따리를 꺼냈다가 아차 싶어서 도로 집어넣으려는데 세상에 나는 그 어린 나이에, 겨우 어리다는 핑계 하나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잘못들을 해 온 걸까. 의미도 명분도 없는 대장놀이에 빠져 그 좁고 얕은 곳을 헤집고 다니던 사춘기 소녀는, 죽었을까. 아니면 뻔뻔히 살아남아 마른 김에 육회와 배와 무순을 싸서 먹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에 무릎을 탈탈 털고 일어나 깜깜한 지하도를 걸었을까. 정말 그것마저 아니면, 대답없는 대문..

20201203

수다빌에서의 바캉스, 수캉스가 돌아왔다. 오늘은 최선을 다해, 평소와 다르게 지내겠다고 다짐했다. 느즈막이 일어나 매실차를 끓이고 호박즙을 데웠다. 평소와 다르게 지내자더니 첫 스타트부터 루틴이다.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고 빨래를 돌렸다. 건물에 건조기가 생겨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나중에 더 큰 집으로 이사가게 되더라도 건조기는 꼭 사야지. 빨래가 돌돌 소리를 내며 건조되는 동안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요가매트와 폼롤러를 왜 이렇게 늦게 샀을까. 벌어서 나한테 쓰자 제발. 놀랍게도 눈 뜨고 일어나 4시간 동안 한 일이 모두 평소와 똑같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휴가를 즐기겠다며? 말만 번지르르하고 몸뚱이는 그저 규칙, 그놈의 규칙을 따라대니 한숨이 절로 난다. 며칠 전 엄마가 요리해서 보내준 닭발을 ..

20201118

갑작스러운 데이터분석 교육 2일차. 겨우 시간 맞춰 회사에 도착했다. 오늘 강의는 확률과 통계다. 교수님이 예제가 너무 쉽지 않냐며 머쓱해하는데 동전을 두 번 던져서 두 번 다 앞면이 나올 확률 1/4 이후로 다 틀렸다. 비전공자는 울었다. 혜씨가 퇴근하면서 카스타드 하나를 손에 쥐어주고 떠났다. 마음을 다잡고자 어김없이 토익을 푸는데 난생 처음보는 문장구조에 난생 처음보는 구어표현까지 떡 하니 등장했다. 그래서 또 다 틀렸다. 인생 쉽지 않다. 지갑을 두고 왔기 때문에 쿨하게 걸어서 퇴근하기로 했다. (토익 리스닝 하나도 안 들린다 미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운동화 밑창은 도대체 언제 까졌지? 이러다 집에 도착할 때쯤 맨발의 기봉이가 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수다빌 바로 옆에는 편의점이 있다.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