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무지게 마음 먹었던 월간 서예원은 돌아오지 못했다.
거의 매일 야근이었고
집에 오면 지쳐 쓰러져 잠들기 바빴다.
제발 일 좀 줄여달라고 징징대지도 못했다.
다들 나만큼은, 사실 나보다 더 바빴고
내가 일을 줄이면 누군가는 지금보다도 더 과로해야 했다.
자격증 시험을 더 미룰 수 없었고
틈틈이 연애도 해야 했고
가족모임도, 동기모임도 매달 있었다.
요약하자면 피곤해 죽겠어서 월간 서예원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일본어 자격시험을 준비하려고 마음 먹으면서
(사실 내 정서에는 안 맞지만) 일본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라는 제목의 10부작 드라마인데
주인공이 나를 닮았다며 팀장님이 적극 추천해주셨다.
1화를 보며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에츠코 역을 맡은 이시하라 사토미는 지구 뿌시는 미모의 배우고
팀장님은 사토미가 아니라 에츠코를 보며 나를 떠올렸다는 것을..
에츠코는 말대꾸 대마왕에 실수를 일삼는, 금쪽이 그 자체였다.
북한에서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서버가 다운되면서 이런 저런 일이 많았다.
당장 내일 전쟁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라,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아야 하냐는 어떤 물음에
내일 전쟁이 나더라도 일단 오늘을 살자, 라고 대충 대답했는데
쑤는 그것 참 감명 깊은 말이라며 한참을 멍 때렸다.
이제 일을 좀 할까 싶었더니
남은 인생 10년, 이라는 일본 영화로 대화가 옮겨갔다.
아마도 너무 몰입했던 건지
나는 10년의 시한부를 살게 되는 꿈을 꿨다.
행복을 찾아 떠나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웠다.
작별인사를 해야 할 이들의 리스트를 들고, 커다란 배낭과 함께 집을 나섰다.
예상대로 엄마 아빠는 울지 않았다.
군고구마 6개가 든 비닐봉지를 건네며 등을 몇 번 토닥여주었다.
버스가 엇갈리며 언니와 제원이는 만나지 못했다.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며 어두운 저녁, 상암동 공원의 벤치였다.
도기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혹시 같이 가 주기를 원하는지 묻지 않았다.
나는 괜히 어색해서 신발끈을 고쳐맸다.
길지 않은 대화가 끝나고 우리 둘 중 누구도 울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늘이 많은 사막이었다.
중간 중간 방공호 같은 것도 보이고, 집만 한 바위들도 보였다.
그러다 전화를 받았는데,
오빠는 교토에 논문 쓰러 왔다며 올 때 물티슈를 가져다 준다고 말했다.
마침 여기가 사막이라 물티슈가 있으면 딱 좋겠다고 말하는 중에 휴대폰이 꺼졌다.
충전기를 침대 옆에 두고 온 게 생각났다.
스마트폰 없이 살 수 없는 현대인은 사막 한 가운데서 좌절했다.
좌절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
행복을 찾아 떠나온 곳은
아무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는 허허벌판이었고
작별인사는 서툴렀고
그야말로 엉망진창 시한부 꿈이었다.
그러니까 휴대폰 충전기를 잘 챙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