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나는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내가 9살 때, KBS에서 쿨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주인공인 소유진과 구본승은 웨딩플래너였고
당시에는 웨딩플래너가 꽤 각광받던 직업이었다.
거실 한 가운데 직사각형으로 친 모기장 안에 누워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너무 어려서 플래너와 디자이너를 구분하지 못한 듯도 싶다.
그림에 영 소질이 없는데 방과 후 수업을 모두 미술로 채워넣자
담임 선생님은 디자이너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나를 타일렀다.
서울에는 좋은 학원도 많고 심지어 물감도 다르다며
(세상에 나는 무슨 이런 거짓말에 속았을까..)
상경을 향한 나의 욕구는 불타올랐고, 다행히 공부를 잘했다.
한편, 체육 선생님은 나의 타고난 체력과 악바리 근성을 일찍이 알아봤기에
내가 농구팀에 들어오길 원했다.
농구부 연습에 몇 번 참가했지만, 152cm라는 패널티를 극복하지 못했다.
서울에 가겠다고 공부만 했으니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정말 내가 봐도 소질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국사 선생님, 체육 선생님, 여행 가이드, 소설 작가, 방송 기자를 순서대로 꿈꾸다가
마침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마지막 순서가 기자였기 때문에 나는 교내 방송부에 들어갔고
억지와 객기에 가까운 군기를 견디기 못하고 3개월 만에 때려쳤다.
공중에 흩날리는 잔해처럼 떠돌다가 갑자기 교환학생을 갔다.
북미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나는 시사프로그램을 만드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
방송 아카데미를 기웃거리고 교육원을 들락거리다가, 작은 경제지의 인턴기자가 되었다.
매일 반복되는 발제가 부담스럽고 괴로웠지만 더 이상 헤매기 싫었다.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그때, 책도 안 읽는 애가 무슨 기자냐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기자가 되지 못했다.
나는 책도 안 읽는 애였기 때문에 당연히 작가도 되지 못했다.
게스트하우스를 차리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회사를 성실히 다닐 수 있는지, 업무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고
그 이후에 투자를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취준을 시작했다.
아직 적성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는, 외식 서비스와 유통 관련 회사에 지원서를 넣었다.
가고 싶은 대기업들은 다 떨어졌다. 아쉽지도 않은 성적으로.
우연히 구인 글을 보고 지원한 IT회사에 덜컥 합격했다.
타고난 기계치에다가 컴맹이었기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했고
나는 입사 후에도 적성 찾기 삼만리를 계속해야 했다.
한때 남북관계가 급격히 좋아지면서, 나는 북한 땅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다.
법 공부가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머리가 더 굳기 전에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나는 공인노무사 시험을 준비했다.
언젠가 내 동생이 말하기를
누나 인생이 재미없는 이유는, 농구선수도 재단사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사실이었다. 고작 서른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인생이 너무 재미없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데이터를 분석하는 건 지루했고
하루종일 키보드를 두드리며 보고서와 장표를 작성하는 건 좀이 쑤셨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주말 데이트를 포기하고 웨딩홀 알바를 나간 것도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재단 봉사를 계속한 것도
그저 재밌게 살고 싶어서였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는 회사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어느 한적한 동네에 4~5층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차려서
1층에서는 커피와 빵을 팔고
유독 손님 없는 날, 빵이 남아 오히려 좋다며 깔깔대고
날 좋은 날 옥상에 이불을 널고 그 옆에 누워
구름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세어볼 수 있을까.